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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비망록

지나간 미래, 다가올 과거

by 스프링데일 2012. 12. 12.

지나간 미래: 평행 세계 (사진 출처: http://www.hdwallpapers.in/walls/parallel_universe-wide.jpg)

모든 것은 예정되어졌던 그대로, 모든 것은 예정되었던 대로 흘러간다.  
과거에 이미 결정되었던 미래에, 미래에 예정된 과거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순간.
나는 변한다, 세계가 변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걱정, 고민, 근심들을 가지고 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때때로 현재의 자신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또한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우리들에게 현재를, 오늘을 열심히 살 것을 종용하곤 한다.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영위한다는 것.  삶을 영위함에 있어 최대의 성실함을 가질 수 있다면 적어도 현재를 보낼 떄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현재를 후회없이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존재할 수 있을까?  일단 나는 그렇지 못하다.  자신감의 결여일 수도 있지만, 자신감이 떨어지기 전에도 내가 생각하는 현재와 미래는 그런 것이었다.  장기적으로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상상력이 높은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앞으로의 우리들 각각에게 일어날 미래의 일들은 단순한 수학적 예상으로는 불가능한 것들.  따라서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졸업을 2주 정도 앞두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아마도 취직.  학점을 받아 조금이나마 더 나은 성적을 가지고 학교를 졸업하는 것보다도 나에게 걱정되는 것은 졸업 후의 삶이다.  솔직히 말해야지.  졸업 후에 내가 어떻게 될지는 - 그게 설령 2주 밖에 남지 않은 미래의 일이라도 - 나는 실감할 수가 없다.  그저 막연한 생각을 가진 채로 나의 졸업 후를 받아들여 파멸할 것인가.  많은 곳에 이력서를 내보고 전화를 돌리고 인터뷰를 간다.  하지만 결과는 늘 두 가지이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너무 넘친다는 곳.  기술직의 경우라면 나의 기술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술을 요구하지 않는 자리에서 단지 내가 다니는 학교만으로, 전공만으로 나를 구분하는 것은 너무나 치사하지 않은가.  물론 그들의 정의는 나름대로의 근거에 기반한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 자리에 내가 과분하기 때문인가?  2주 후 내 미래는 잘해봐야 사회 초년생이다.  사회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미숙아가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가 자신에게 적합한지 부적합한지를 판단한단 말일까.  최소한 1년은 걸릴 일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출생을 자신의 의지로 정하지 못한다.  아마도 죽음이라는 것이 유일한 의지적 선택일 것이다.  그렇다면 태어남을 강요받은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 아마도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적응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20년이 넘어가는데 왜 일자리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일까.

그 것은 분명 윗 세대들의 잘못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윗 세대는 그 윗세대로부터 기인한 그들의 논리와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의 잘못이더라도 우리 세대는 그들을 욕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태어나져 그들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때때로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었지만, 이 모든 시도나 노력은 그들이 이 세상을 준비해 주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내가 비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일 뿐이다.  현실에 편하게 안주한 채로 이십 몇년을 살아온 나에게 지금 닥쳐온 현실은 너무나 커다란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나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미래는 불안하다.  하지만 안정성 만큼이나 불안정성 만큼도 사실은 안정적인 개념이다.  미래가 만약 불안하지 않고 확실했다면 우리들의 삶은 지금의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을 띄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삶도 그랬을까?  먹을데로 나이를 먹은 이상 나에게 이런 환경을 만들어준 요소들에게 잘못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윗 세대는 현재의 우리 세대에게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았고, 책임감을 느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의 우리 세대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나 그로 인해 후대에 어떤 영향을 끼치더라도 다음 세대에게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신의 일은 결국 자신이 관장해 나가야하며, 어떤 경우라도 타인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잘잘못과 시시비비를 따져가며 어떤 일에 누군가가 조금 더 많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사례들은 분명히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가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그 사람을 비난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애초부터 비난 자체를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다쳤다.  누군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의 목에 비수를 들이대는 것과 비슷했다.  아니, 타인을 비난할 시간이 있었다면 나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스스로 깨닫는 것이었다.  약한다는 것은 자신의 치부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누구나 자신의 약점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에게 그 것들을 지적 받았을 때 부끄러워하거나 화를 내는 이유는 속마음을 들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나는 너무나도 서툴렀다.  자신의 약점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언제나 인정하면서도 그 것들을 숨기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고, 어느 순간부터는 약점이 더 이상 약점으로 보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고 말았다.  하지만 약한 면들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더 이상 나의 일부였던 나의 약한 면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새로운 내가 되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게 된 나는 우주의 엔트로피가 계속 증가하는 것 만큼이나 타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외부적인 상황들도 나를 힘들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현실에서 도망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확실히 악의를 가지고 흘러간다.  내가 마주한 현실을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그 현실은 시간이 흐름에 기대어 나에게 가까워진다.  결국 나는 도망칠 곳이 없다.  여기서 어떻게든 결판을 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아직 내 손에 남아 있는 것들까지 모두 사라질 것이다.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변해야 한다.  세계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이 변화할 수 있다.



다가올 과거: 뫼비우스의 띠 (사진 출처: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9/M%C3%B6bius_strip.jpg)

현실은 모르는 곳에, 꿈은 현실 속에 
그리고, 진실은 마음속에 있어 
사람의 마음이, 자기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으니까 말이지 
그리고, 누군가의 이미지에 의해, 사람은 마음의 벽으로 향해 가.
이미지를 상상하는 힘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 내 가는 거야 

단지 사람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 
그러니까, 잃어버린 자신은, 자신의 힘으로 되찾는 거야. 설령, 자신의 언어를 잃어도.


나는 언제나 행복을 꿈꾸며 살았다.  역설적으로 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의 행복은 언제나 과거에 있었을 뿐이며, 아무리 밝은 미래를 상상하려고 노력해도 어둠만이 떠올랐으며, 그런 어둠을 예상했던 미래의 시점은 그 시점에 도달했을 때 나의 예상이 그다지 틀리지는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셈이 되었다.  대단한 불행은 아닐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내가 처한 상황에 비해 더욱 답이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녀석들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을테니.  따라서 나는 그들에게 내 상황에 대한 이해를 강요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비교가 불가능한 것들은 공존할 수 있다, 비록 그 사이에 공존은 없을지라도.

나는 스스로를 망쳐버렸다.  염병할 붓질은 한 번에 끝내야 했다.  일필휘지.  지난 2년 반 동안 김성현의 삶은 찬란했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친구였고,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제자였으며, 누군가에게는 그들을 이끌어가는 거장이었다.  내 최고의 순간은 내 존재의 모든 시간이었다.  나는 항상 최고였다.  나의 마지막 실패는, 그것이 내 실패이기에 이미 소중한 것, 최고의 것이었다.  그것은 완전무결함에 난 흠집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까지도 포함해서 완전무결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소중한 실패를 망쳐버렸다.  스스로 구축한 작품을 망쳐버린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마음껏 고집을 부릴 것이다.  집념을 발휘할 것이다.  도덕을 요구하는 나약한 것들의 천박한 투정 따위는 무시할 것이다.  그것들은 도구인 도덕을 삶의 목적으로 만들어버렸고, 내 자신도 그런 것들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목적인 삶을 도덕의 도구로 바꾸었을 뿐이다.  꿈 깨자.  그런 것들은 무시해야 한다. 커다란 것을 보지 못하고 단지 눈 앞에 보이는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일에 근거 없는 경외감을 보내는 녀석들에게 닥치라고 말하겠다.  나의 인생은 하나이다.  그리고 나의 가치관도 하나이다.  따라서 죽을 때까지만 그렇게 할 것이다.

한 학기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다고 자부한 취업활동은 결국 실패로 끝난듯하다.  상황을 탓해봐야 무엇하리.  결국은 다 내가 부족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이력서에서는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인터뷰만 하면 나는 나의 장점을 충분히 어필하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 내가 부족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여력이 없다.  기회가 된다면 노력은 해보겠지만,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졸업 후 밀린 학자금과 다른 빚들을 변제하는 것.  따라서 여유롭게 일자리만을 알아볼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3년 전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지금의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하자.  그렇게 하면 며칠 전 나에게 교훈을 주었던 녀석의 말처럼 나의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녀석과 더불어 나의 구직 활동에 많은 도움과 조언을 준 다른 녀석에게도 감사를 보낸다.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꼭 해야하는 것들이 있다.  현재의 길을 걷는다는 것.  이번에도 미래를 잡는 것은 실패했다.  나에게 보장되어있을 지도 몰랐던 미래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자, 이제 3년 전의 과거로 돌아온다.  같은 과거를 마주하게 되더라도 나는 그 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주어진 난관들을 답파해 보이리라.  행복은 애초부터 그 곳에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 멀리 돌아왔다.

행복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아직 모르겠어.
그렇지만, 여기에 있고 싶어. 태어나서, 어땠는지...
이제부터도 계속 생각할거야.
그렇지만, 그건 당연하게도 몇 번이나 눈치챌 뿐인 거야.
자신이 자신으로 있기 위해서...

- 終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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