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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비망록

20210521 - pick up

by 스프링데일 2021. 5. 22.

과거에 비해 점점 고학력자가 늘어가는 추세이지만, 내가 대학교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윗세대는 야간대학교를 다니거나, 아예 고졸이나 중졸도 많고, 만학도를 존중해주는 분위기도 많았던 것 같은데, 내가 대학교를 갈 때 쯤엔 4년제, 아니 못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본인의 선택으로" 취업전선에 바로 뛰어들거나 2년제 정도는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대학교를 "안 가는" 것은 몰라도 "못 가는" 내 처지가 좀 말이 안되는 것 같았고, 비자문제로 취업도 할 수가 없었던 채로 이상한 역사 하나를 더 써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대학교에 갈 생각조차도 못했었다. 요즘은 고졸을 찾기도 정말 힘들다.

한편 늦게나마 대학교에 갔기 때문에 2년 반이라는 세월은 졸업이 다가올 수록 세 가지가 아쉬웠었다. 4년을 다니지 못했던 "일반적이지 못했던" 짧은 대학 생활이 마음에 안들었고, 좋아하는 전공을 한 것은 좋은데 우리 동네에 IT회사가 너무 많아서 이걸로 취업이 될까 좀 걱정을 했고, 우리 학교가 제공하는 공대 커리큘럼이 나쁘지 않았던 것. 그래서 마지막에 컴퓨터사이언스를 듀얼로는 못해도 부전공 정도는 해보려고 시도는 했는데, 정말 열심히했는데 너무 어려웠고 그 이상 학자금을 빌릴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졸업을 해버리고 말았다. 신기했던 것은 그 당시 배운 기본적인 개념들을 실생활에 잘 적용시키고 있지 못했는데도, 예전에 웹디자인할 때 의미도 모르고 열심히 쓰던 php랑 vba랑 sql과 결합해서 취업할 때 잘 써먹었다.

취직하고 나서 처음 만들었던 프로그램은 어떤 서버의 raw data를 가져다가 vba로 프로세싱하고, 거래처들에게 보낼 외부용 실적 보고서와 내부에 돌릴 내부 실적 보고서 10건 정도를 매주 자동 출력해서 송부하는 녀석이었다. 입사 초기라 할일이 많이 없어서 그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재미가 들려있었고, 옆의 디자이너 분께 도움을 받아 어설프지만 UI까지 갖춘 툴을 만들었을 때 무언가에 내가 생명을 부여한 느낌이었다. 전임자는 이걸 3일씩 걸려서 했는데, 이걸로는 10분이면 할 수 있었으니깐.

1년 정도 그걸 잘 써먹고 나서는 다른 팀으로 옮기는 바람에 더 이상 활용할 기회가 없었고, 새로 맡게 된 재무 및 금융 데이터는 데이터 연동이 힘들고 수작업이 너무 많아서 자동화를 포기했었다. 그리고 나서 8년이 흘렀다.

서버에 직접 물려서 sql을 스크립트로 돌리는건 어느 정도 진척이 되어있었고, 그냥 이제는 코드를 어떻게 짜서 최적화 하고 그러는 것들이 그냥 모두 단순 작업의 반복인 것 같아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VM에 VM에 VM을 거쳐 파일을 빼내는데 수동 결재가 필요하고.. 그래서 아무튼 다 놔버리고 그냥 손으로 열심히 코드를 짜고 GDPR/CCPA 같은 개인정보 보호 어쩌고에 관련된 계약서 같은거나 수십페이지 쓰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많은 놈들이 손으로 해도 될 데이터 작업들을 py나 R을 통해서 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것들을 활용할 생각조차 안하고 막연히 그냥 놓고만 있었는데, 최근에 아무래도 이게 필요할 것 같아 동영상을 몇개 보았다. 그리고 계속 필요한 작업들을 손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py를 활용해야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마음 속으로 어떻게든 안하려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정말 도망갈 수가 없어 결국 라이브러리들을 읽고 구글링을 해가며 함수를 만들고, 팀 동료들이 써놓은 코드들을 봐가며 py로 새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버렸다... 아, 정말 만들어버렸다. 못할 줄 알았는데 이번 주의 마지막에 갑자기 재미있는 성과가 나와버렸다. 그냥 시발 해야겠네, 할까, 할 수 있을까, 못한다고 할까 등의 생각들이 뇌 한켠에서 순환하고 있는 동안 쥬피터에서 뭔가가 튀어나와버렸다.

사실 생각해보면 예전에 쓰던 vba나 php와 문법만 다르고 그냥 하면 되는 거였는데, 어지간히 하기 싫었나 보다. 그냥 하면 되는건데 그냥 너무 싫어서 보고 있지도 않았고, 손으로 작업해도 비슷한 속도가 나와서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건 아직 시작일 뿐이니 use case를 조금 더 늘려보도록 하자. 기계학습용 데이터를 준비했으니, 다음은 기계학습이 될 것 같다. 알고리즘은 똑똑한 놈들이 만든거 쓰면 되고.

어제는 미래사회에 대해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그래봐야 대부분은 엘빈 토플러 책같은 내용이었는데, 현재의 직업을 고숙련, 중숙련, 저숙련으로 나누었을 때 기계 발전으로 중숙련이 없어진다고 한다, 정확히는 고숙련과 저숙력으로 나눠진다는 것. 직업의 양극화 같은 것이다. 저숙련은 기계를 쓰는게 채산성이 안맞고, 고숙련은 기계를 이용해서 능률을 올릴 것이라고. 글 내용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한 가지는 인상깊었다. 중숙련자들은 기계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필요가 없는 일을 잘 나눠서 고숙련이 되던지, 다 놔버리고 저숙련을 하던지, 안그러면 망한다고. 망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냥 조금만 놔버리면 된다.

최근 섹스맨으로 커밍아웃한 빌게이츠 형이 예전에 미래로 가는길이라는 책에서 음성인식에 대해 이런 말을 했었다. 기계가 사람말을 알아들어야되는데, 사람이 기계가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또박또박 말한다고. 이건 20년이 지났지만 시리나 빅스비가 나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리고 최근 타블렛을 사서 필기 인식으로 글을 쓰는데, 꽤 잘 인식하기는 하지만 계속 비인식이 생겨 그걸 고치려고 컴퓨터가 알아먹도록 몇번이고 글씨를 예쁘게 또박또박 쓰려고 한다. 누구를 위한 기술 발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기술 자체는 계속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자가당착인가 싶기도 하다. 만드는 놈은 인간인데 기계 발전을 위해서 기계를 발전 시키고 있다. 아마 필기나 음성 같은 것들은 기술이 계속 발전하기는 하겠지만 나중에 뇌에다가 직접 꽂아서 하는게 아니면 100% 기존의 방법을 대체하지는 못할 것 같고, 뇌에다가 직접 꽂아서 하는게 나오면 아마 도태될.. 이를테면 과도기적인 기술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뭐, 그런거 하는 똑똑한 놈들이 다 생각이 있겠지? 바둑 같이 룰이 있는, 폐쇄환경에서는 기계가 이기긴 했으니깐.

SELECT 시리얼 코드 FROM 데이터 베이스 WHERE 코드 데이터 ORDER BY 공격성 정보 전투 HAVING 터미네이트 모드

오타쿠가 쎘던 예전 시절, 나가토 유키가 SQL을 무슨 마법 주문으로 외우는걸 인상깊게 본 적이 있다. 일본애들은 이런 것도 모에요소로 써먹는다 싶어 신기했는데, 내가 그걸 거의 10년 넘게 만지게 될 줄은 몰랐다. NoSQL이라는 녀석도 꽤 참신한 개념인 것 같은데, 다행히도 관계형 DB는 당분간 안망할 것 같아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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