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때 우리 동네 학교들은 무슨 시범학교? 같은것들을 해야돼서 커리큘럼이 조금 달랐었다. 원래 초등학교는 담임선생님이 전과목을 가르치는 걸로 아는데, 우리학교는 중학교처럼 각 선생님들이 한 과목 씩 맡아서 반들을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사회시간을 좋아했는데 6반 담임 선생님이신 박석은 선생님께서 우리 4반으로 오셔서 수업을 재미있게 진행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 분과 개인적으로 친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의 수업이 늘 기대됐고, 1학기 초, 2학기 초에 나온 수업 계획표 같은 문서를 보면 매주 무슨 공부를 하고, 한학기에 두번 정도씩 애들을 모아서 연극을 하는 수업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애들을 모아서 조를 짜야하는데... 잘 기억은 안나는데 선생님께서 애들 몇명을 골라 연극을 준비시키셨다. 언젠가 나도 그 역할을 맡게 되어서 우선 애들을 모았다. 왠지 모르지만 당시 기억해보면 집에 컴퓨터를 활용하는 애들이 많이 없었고, 무엇보다 이런걸 나대면서 하는 놈들이 별로 없었다. (김동현이라고 한 놈 있었다, 똑똑하고 리더십 있는 친구인데 나중에 이놈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대본을 썼다)
등장인물들을 구상하고 대본을 짰는데 지문과 대사를 열심히 워드에 넣었다. 국어책에는 이런 연극 대본 같은 것들이 가끔 실려있어서 많이 참조했고, 문서 맨 앞단에 어떤 특이한 폰트로 "벨테브레와 하멜" 이라는 제목을 보라색? 또는 자주색으로 넣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연출했던 첫 작품이었다.
A4용지를 뭉텅이로 뽑아 대본을 돌리고, 일주일에 몇 번씩 방과 후 강당에 모여 대사를 읽었다. 도돌이표를 하는 것처럼 대사가 틀리거나 느낌이 안 좋으면 몇 번이고 다시 했고, 다들 잘 따라와줘서 작품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진행하면서 정말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는데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6학년 쯤이면 이미 애들이 파벌이 많이 나눠져있는데, 우리반에는 공부 제일 잘하는놈 하나가 있고, 게임 잘하는 애들 몇명, 무서운 애들 몇명, 그리고 어중간하지만 좀 착한애들 몇명. 한편 여자애들은 뭔가 덩치로 나눠졌는데 큰 애들 그룹, 공주 그룹, 작고 조용한 애들 몇명 등등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들과 모두 친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 때 나는 사람을 안가리고 장난을 너무 많이 쳐서 여자애들은 각 그룹에서 한 두명씩은 말을 터고 지냈던 기억이 나고, 남자애들과의 관계도 원만했었던 것 같다. 각 그룹에서 한 두명씩 물어보고 같이하자 그러고, 그러면 오케이 한 애들이 또 자기 친구들을 한 두명씩 데리고 오고, 그렇게 해서 열명이 조금 넘는 그룹이 만들어졌다.
호위무사, 사또, 임금님, 지나가던 상인 등등 여러가지 배역이 있었는데 주연 1명, 조연 2~3명, 그리고 필요한 엑스트라가 정말 많아 돌려서 했기 때문에 대사 분량으로 따지면 아마 다들 비슷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소품반이기도 했다. 그 중에 공주 그룹에 어떤 여자애가 한명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그날따라 그 아이가 까칠했다. 그 아이의 기분이 어떤지 배려할 수는 없었지만, 자꾸 안따라와줘서 나는 좀 짜증이 나있었던 것 같고, 걔는 걔대로 뭔가 꼬장을 부리고 있던 것 같았다. 분명히 개인적인 일이거나 연습에서 뭐가 맘에 안든 것이다. 나는 참고 또 참으며 계속 연습을 반복시켰는데, 그 여자애가 너무 안따라와줘서 답답한 마음에 결국 애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왠지 걔도 울음을 터뜨렸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데 내가 자꾸 지랄해서 힘들었나보다라고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아이와 나 사이의 문제는 아니었으나 그 아이가 힘든데 내가 너무 쪼았던 것 같다.) 한편 그 상황은 다른 참가자들도 꽤 상당히 짜증이 난 분위기였는데, 평소에 얌전하고 어른스러워서 별명이 곰이었던 큰 여자애들 그룹의 한명이 "그러니깐 제대로 하자고 씨발년아 지금 너 때문에 다들 고생하잖아" 라고 흥분해서 말했다. 그리고 아차 싶었는지 그 아이도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 같이 울다가... 왠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나서 모두 해결이 되었다. 아마 너무 강행군으로 연습을 달려서 힘들었나 보다. 참고로 남자애들은 그냥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시발롬들..
다른 하나는, 우리 반에 조금 무서운 애들이 둘 있었는데, 얘네들도 우리 그룹으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나는 얘들은 중학교 때도 계속 무서워하긴 했지만 적어도 연극은 조화롭게 잘 진행되었다. 그 녀석들은 호위무사와 장군의 역할을 했고, 맡은바 충실하게 해줘서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자꾸 욕을하고 애들을 괴롭히려고 해서 곤란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들과 함께 온 무서운 여자애가 내 편을 들어줬고 무엇보다 그 녀석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연극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싶어하는 눈빛을 갖고 최선을 다해 임해주었다. 연극이 끝나고도 학기 말까지 왠지 같은 그룹이 되어 잘 지냈지만 걔네들은 중학교에 가서 일진이 된다... 아 무서웠어.. 지금도 무서워...
이 때 부터 나는 주인공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뭔가 제 3자의 위치에서 씬을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네 그룹의 연극이 모두 끝나고 박석은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이 있다. "여러분 모두 너무나 잘했지만, 이번엔 '벨테브레와 하멜' 이 제일 많은 준비를 했던 것 같네요" 나를 포함한 우리 애들의 얼굴은 모두 환해졌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울음을 터뜨렸었다. 지금 글을 쓰면서 그 때를 회상해보면, 그 때는 내가 감독/연출 이런 느낌이긴 했지만 그 연극은 내가 준비하고 이끈게 아니라 정말 다같이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던 것이었다. 협동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했던 기억일까?
오래 전 기억이고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미화된 부분도 상당히 있겠지만, 여러 사람들이 모여 공통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흥미롭다.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고 멀리가고 싶으면 같이 가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리고 언젠가 학교에서 배웠던 collectivism과 individualism의 개념이 있었는데, 나는 언젠가부터 혼자 가는 법에만 익숙한 것 같다. 사람이 먼저다 같은 말을 하고 싶은건 아니다. 그러나 함께했을 때 무언가 결과가 나왔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나한테 그런 면이 있었다는 것도 신기하고, 벨테브레랑 하멜이 각자 다른 선택을 한 것도 신기하다. 그들 개개인의 차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라는 녀석도 무시 못할 것이다. 하멜도 처음에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는 제주목사가 잘해줬다고 한다.
몇 년이 흘러 미국에 왔고, 나는 벨테브레가 아니라 하멜이 되어버렸다. 교과서에서 읽었던 하멜의 조선 체류기는 사실 표류기였고 그 현실은 시궁창이었다는 것을 점차 깨달았다. 오고 싶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던 나라에 갑자기 들어와서 이상한 경험만 하다가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저께 유튜브가 추천해준 영상을 보다가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봤는데, 아 정말 싫었겠다... 나는 그걸 미화했으니. 대본에서 한 장면이 기억난다. 벨테브레의 입장에서 그는 박연이라는 이름을 받아 조선 여자와 결혼해서 조선인으로 살고 있었는데 한 20년 쯤 있다가 하멜이 와서 한 10몇년을 쌩고생만 하다가 도망간다. 나는 그걸 박연의 입장에서 해석하며 대사를 하나 넣었는데, 대충 "아.. 정말 그리운 고향의 친구가 나를 놔두고 다시 떠나가는구나, 나는 이 곳에 결국 혼자 이방인으로 남겠구나" 의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앞에 지문으로 (하늘을 보며 흐느끼며) 뭐 이런걸 넣었던 것 같다. 아무튼 벨테브레는 현지화를 잘했다.
하멜은 고생만하다가 결국 일본으로 도망치고, 귀국해서 "하멜 표류기" 라는 책을 썼다.
그의 인생도 꽤 파란만장했던 것 같다.
배경음악을 넣는다고, 당시 프린세스메이커 3의 CD를 가져와서 틀었었다. 이건 연극 시작하면서 오프닝때 틀었던 노래다.
아 협동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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