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 규식이형네
1500 할머니댁
1600 물놀이
1800 저녁식사
2000 노래방
2200 음주
2800 취침
명장동 -> 해운대 -> 경상남도 밀양시
1500 할머니댁
1600 물놀이
1800 저녁식사
2000 노래방
2200 음주
2800 취침
명장동 -> 해운대 -> 경상남도 밀양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겨울이라면, 그 곳도 겨울일까.
작년 내가 있었던 곳이 여름이었다면, 그 곳도 여름이었을까.
지금 나는 이 곳에 있는데, 왜 그 분은 그 곳에 계시지 않은걸까.
つひに行く道とはかねて聞きしかど昨日今日とは思はざりしを
5년 전의 부산에 비해 이번 부산 방문은 친척 분들을 모두 만나고 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초등학교 때 이후로의 기억이 나지 않는 가장 위의 큰엄마 - 즉 규호, 규식이형의 어머니 - 부터 해서 많은 어른들을 뵐 수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혈연을 찾게 되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재미있는 점이다. 나는 부산의 친척 어른들과는 그다지 가깝지 않다. 거리감부터 해서 여러가지 요소들이 작용한 것이리라. 그래도 큰엄마께서는 수 년만에 찾아온 당신의 조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신다. 큰엄마는 이제 얼굴빛이 조금 좋아지셨다. 시간의 흐름은 사람을 무뎌지게 해준다. 그리고 사람의 기억을 잊혀지게 해준다.
오랫만이었지만 짧은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밀양의 할머니댁으로 향하게 된다. 큰엄마와 헤어지는게 내심 아쉬웠지만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나는 큰엄마와 친해질 기회를 이날 이후에 다시 가질 수 있었다.
스카이뷰 찾느라 힘들었다. (출처: Daum View)
며칠 동안 우리를 위해 수고해 준 규식이형
# 謹弔
나리누나가 찍어준 나와 준현이, 규식이형, 할머니, 고모
# 追慕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것이 죽음이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은 없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평등한 권리. 나에게도 그런 권리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죽음이라는 것을 정할 수 있다면, 아마도 죽음의 방법이 아닐까.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죽음이란 무엇일까. 아무리 머릿속에서 뇌까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생과 사의 경계 속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을 만든다. 떠난 사람은 無가 되지만, 만약 남겨진 사람들이 떠난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것은 진정한 無는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할머니를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할머니의 존재가 남겨진 사람들 속에서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잠시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아직 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무렵 7년 만에 들렸던 밀양은 나에게 새로웠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시골 풍경들은 한 때 나에게 익숙했던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질감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듯 했다. 다리 밑의 개울가. 그 곳에 도랑을 치고 가재를 잡거나 어망을 치고 피리나 송사리를 잡는 것. 물가에는 실잠자리나 물잠자리가 있다. 검은 날개를 가진 물잠자리.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적 곤충이나 벌레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무서워 했던 것이라면 사마귀나 나방 정도가 아니었을까. 개울이 아니라 잔디밭에서도 방아깨비나 메뚜기들을 심심치않게 잡기도 했고 개구리나 두꺼비도 잡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보고도 도망다녔다. 미국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물잠자리를 볼 때면 예전의 기억이 나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 녀석들을 맨손으로 잡지 못한다. 그 외에도 이 곳에는 돗자리에서 햇볕을 받아 빨개지고 있는 고추나 대나무숲, 그리고 닭장 같은 여러가지 내가 기억하는 "한국적인" 모습들이 많이 남아있다. 잃어버린 것은 아마도 곤충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닐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나리누나 |
역시 가장 가까운 친척들 |
여름이었는데도 밖의 해가 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식사 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한 것 같다. 할머니와 고모는 외국에 있다는 것을 핑계로 연락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나와 동생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만 보실 뿐이다. 기억해보면 이 시점에서 할머니께서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다. "우리 성현이 준현이, 공부 열심히해서 훌륭한 사람 되어야지. 할매 이제 얼마 못 살 것 같다." 정정하신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니 송구스럽기까지 했다. "에이~ 할머니, 어차피 내년에도 또 올 건데 그런 섭섭한 말씀 하지 마세요 ㅠㅠ" 아마도 이 시점에서는 할머니께서도, 우리로서도 이후에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실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마치 초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처럼 나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고, 할머니와 고모, 규식이형, 그리고 나리누나에게 얼마든지 귀여움을 받았다. 그 것은 나로 하여금 오랫만에 가족애를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아서 너무나 따뜻했지만, 결국 마지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 집에는 할머니도 안 계시고, 그 집도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것 같다.
한 달 전쯤부터 이 글을 쓰려고 계속 몇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지만, 어떻게 해도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 8월 14일까지의 일기는 그저 좋은 기억들에 대한 기록들이었다. 물론 8월 15일의 일기도 그렇게 될 예정이었지만, 이제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적는 것조차 죄스러움과 어색한 기분이 든다. 분명히 다른 어떤 날보다도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 2009년 8월 15일은 그 일기를 쓰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마음 속에 있는 감정이라는 녀석은 분명히 슬픔과 그리움으로 가득한데, 글로써 잘 표현이 되지 않는다. 그 동안 블로그에 노래 가사 같은 내 글이 아닌 것들을 올린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할머니를 뵈었던 날, 그리고 친척들과 함께 했던날에 느꼈던 나의 감상과 추억들을 어떻게든 기억속에서 꺼내 아름다운 일기를 쓰고 싶었지만 그 것이 불가능 하다는 사실은 내게 곧 무력함으로 찾아왔다. 글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진다는 것, 그 것은 추억을 머릿속으로만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나는 기록을 남기려고 최선을 다했다. 최소한 이렇게 글로 남겨둔다면 나는 언젠가 이 글을 다시 읽어볼 것이다. 그 때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새긴다는 것, 그 것만으로도 적어도 할머니는 이 세상에는 계시지 않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언제까지고 살아 계시리라 믿는다.
그렇게 할머니께서는 이 세상을 다녀가신듯 하다.
四大假合
今將返眞
何用屑屑往來
勞此幻軀
吾將入滅
훍과 물, 불과 바람이 모여서 된 이 몸
이제 참된 나로 돌아가노라.
무슨 까닭에 부질 없이 왔다 가면서
이 허깨비 같은 몸을 수고롭게 하리오
나 이제 멸도에 드노라.
다녀가신다
今將返眞
何用屑屑往來
勞此幻軀
吾將入滅
훍과 물, 불과 바람이 모여서 된 이 몸
이제 참된 나로 돌아가노라.
무슨 까닭에 부질 없이 왔다 가면서
이 허깨비 같은 몸을 수고롭게 하리오
나 이제 멸도에 드노라.
다녀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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