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0 Accounting
1500 영중이랑 스타
1900 송아, 유진이
2000 커피빈, 한국에 남은 사람들은 내가 이민간 이유를 잘못 알고 있다, 경혜
2100 가르텐비어
2300 귀가
분당동 -> 미금역 -> 서현동 -> 분당동 -> 서현동 -> 분당동
#_은유의 존재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한 친구들 중 하나인 은유. 지금도 나는 반 기독교에 가깝지만, Palo Alto에 오고 나서 교회를 다님으로써 알게 된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 사람들 중 은유는 나와 유일한 동갑. 항상 내가 갈망하던 남녀 사이의 우정이 현실화된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녀는 Las Vegas로 떠났고, 그 곳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펼치기 위해 돌아가던 도중 작년 겨울에 San Francisco에 잠깐 들려서 2년 만에 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가지고 있던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 녀석을 보자마자, 아무 말 없이 안아주었다. 재회의 시간은 5시간이 채 안되었지만, 어색함 따위는 없었던 것 같다. 다만, 그 시간의 공백 동안 우리는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았고, 어느덧 동등했던 우리의 입장에서 내가 왠지 뒤쳐진 것 같다는 자격지심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그 녀석이 부러웠다. 시간의 공백으로 인해 공통된 대화의 소재는 왠지 고갈되었지만, 은유는 엄마가 유일하게 좋아하던 나의 이성 친구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재회했을 때, 그 녀석은 무언가 두려워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살아갈 테니 이런 저런 걱정이 많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녀석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말 한마디도 못하는 그런 부족한 친구였던 것 같다. 그리고 걔도 그렇게 나한테 섬세하게 대하진 않았다. -_-
그랬던 녀석을 반년 만에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왔다. 이미 그 전부터 한국에서 보자고 약속을 했지만, 일의 스케줄과 남자친구로 인해 항상 바쁜 그 녀석을 보는 데는 내가 한국에 오고도 3주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도 점심 식사 후에 바로 일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예전의 만남에서는 항상 약속장소에 내가 늦게 나가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제한된 시간이라는 생각에 만나기로 한 미금역 앞에서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서 그 녀석을 기다렸다. 10분 여를 기다렸을까. 은유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 이제 출발해 ^^” 그리고 도착하기 직전에 한번 더 문자가 왔다. "너 현금 있니? 나 택시비좀." 개년..
택시에서 내린 그 녀석의 표정은 예전보다 많이 밝아져 있었다. 햇빛을 피해 다니는 듯한 창백한 얼굴을 늘 하고 있던 녀석이었는데, 항상 무표정이었던 얼굴도 생글생글 웃고 있었고, 무언가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는 듯 해서 걱정을 덜었다. 활짝 웃으며 나에게 건네는 말, "야!" 너 정말 많이 변했구나 ㅜ_ㅜ 스시를 먹으러 가자고 해서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예약까지 꽉 차서 할 수 없이 옆의 샤브샤브 집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변한 그 녀석의 모습에 계속 놀라고 있었던 것 같다.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위화감까지 드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대화의 흐름이 끊기지 않게 계속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고 무언가에 대한 얘기를 이어갔다, 예전의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나였는데.
중간에 아직 Las Vegas에 계시는 은유의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오랜만에 아줌마께 인사를 드리다 보니, 예전에 은유네 집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뵙던 아줌마의 모습이 기억났다. 시간이 정말 많이 지났구나.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 나와 은유는 예전에 비해 서로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이 것은 은유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나의 친구들이 그런 편인 것 같은데, 항상 발전이 있어 보이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내 자신에게 조급함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아이는 내가 늦은 게 아니라며 조급해 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기도 했지만,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나는 늦지 않았더라도 조급함은 항상 마음 속에 담고 살아야 스스로에게 자극이 되는 것 같다.
은유는 나의 방황시절을 아는 몇 안 되는 아이들 중 한 명이다. 방황이라고 해봐야 사춘기의 청소년이 할 법한 그런 평균적인 현상에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그런 방황이지만, 내 주변에는 그 것을 아는 녀석이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 나는 크게 두 가지의 방황을 했었다. 한 가지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반항심,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의 문제였을 것이다. 아마도, 후자는 그나마 아는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두 가지를 방황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 많은 것들에 영향을 준 전환점이라고 부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은유는 그것들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 편에 서주었다.
교회에 다니던 시절엔 은유와 나를 포함해 우리들의 정신적 지주이던 병욱이 형까지 셋이서 곧잘 만나곤 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우리를 보면서, 병욱이 형은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나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와 은유를 붙여놓고 놀리는 경향이 곧잘 있기도 했는데, 연애감정이 거의 안 느껴진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성격적으로나 외모적으로나 그렇게 하자가 있는 녀석이 아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남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은 스타일이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ㅋㅋㅋ) 털털하지만 때로는 여자애같이 굴 때도 있다. 나는 재수없다고 생각했지만-_- 거기에 넘어가는 남자애들도 몇 명 있었나 보다. 때때로 나는 그런 남자애들의 적대감을 받기도 했다.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사람들 중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은유는, 이제는 나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산다. 그래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가지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 같다. 다만, 내가 그 녀석을 기억하는 만큼 그 녀석도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언젠가는 다시 예전의 그 날들이 올 지도 모른다.
한 시간여의 식사를 끝내고 커피샾에 잠깐 들렸다가 미금역 앞에서 그 녀석을 수원 가는 버스에 태워주었다. 사는 곳은 수지이고 나도 한국에 있는 동안 수지에 갈 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국에 돌아오기 전에 몇 번은 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로의 스케줄이 계속 엇갈려서 결국 못 보고 왔다. 49일 동안의 한국 체류 기간 동안 두 시간을 채 못 만난 것이 되어버렸는데, 이는 섭섭하지만 어쩌면 지금 당장은 우리가 만나서는 안될 운명임을 암시하는지도 모르겠다. 은유를 보내고 나도 돌아가려다가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세상에서 가장 받기 싫은 전화. 할 수 없이 PC방에 가서 적지 않은 돈의 융통을 끝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네이트온에 한 아이가 접속하는 것을 보았다.
이미 내가 한국에 온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간단한 얘기를 하다가, 저녁에 잠시 보기로 하였다. 오후쯤 집에 돌아와서 영중이와 스타를 하면서 놀다가, 송아에 대해서 물어봤다. 아, 경재네, 호준이네, 재하네, 고은이네, 송아네 집과 우리 집은 예전부터 원래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리고 그 아줌마들 모임은 우리 집이 빠져나간 뒤에도 아직까지 거의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자녀들은 안 그런가 보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경재와 호준이는 다른 학교를 다니면서 예전처럼 같이 놀지는 않게 되었고, 남자 아이들은 동생들도 포함해서 최소한 내가 한국에 있었을 때까지는 같이 돌아다니면서 놀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았다. 영중이는 송아의 이름은 기억하는데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송아가 어떻게 변했을까 싶기도 하고, 예전에 내가 알고 있는 그 녀석의 모습을 기억해내려고 계속 애쓰는 동안 딴 생각에 잠시 빠져있었고, 나는 그날 처음으로 영중이에게 스타를 졌다. 미안, 핑계다. 며칠 전에 하고 나서 정말 열심히 연습한 것 같다.
#_송아에 대한 시간의 조각들
키가 너무 컸다. 내 기억으로는 중학교 때 여자애들 사이에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큰 키는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중학교 때 키가 크거나 등빨-_-이 있는 여자애들은 인상 깊어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긴 한데, 분명히 송아는 그런 타입이 아니었었다. 그런 애가 지금은 170이 넘는 늘씬한 애가 되어있었다. 멈추어져 있던 8년 전의 시계는 불과 5분 만에 8년치를 다 돌려버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또 한번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본 단발머리에서 지금은 웨이브가 약간 들어간 긴 머리와, 커다란 눈. 찰나이긴 했어도, 정말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잠시 안부를 묻는 얘기를 했는데, 송아는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유진이, 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같은 반이었던 경혜와 계속 연락을 한다고 한다. 참고로 한 가지를 얘기하자면, 나는 분당에 오고 나서부터 미국으로 뜨기 전까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포함해서 4년 동안 계속 송아와 같은 반이었다. 그 때 나는 왠지 되게 기분이 나빴는데, 송아도 그 사실을 알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피차일반이구나ㅋㅋ 그런 송아를 보며 계속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느끼는 나에 비해, 송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그 것은 잠시 후에 유진이가 잠깐 얼굴 보러 왔다 가면서 더 확실해졌는데, 나를 보자마자 하나도 변한 게 없다면서 오히려 더 놀라고 있다. 내 얼굴이 기억 속에서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는데, 보자마자 다 기억이 나버렸다고 했을 정도니.
과외 하러 가던 중이던 유진이를 보내고 송아와 간 곳은 일식집. 이 때는 이미 한국에 와서 웬만한 걸 다 먹어본 시점이 되어서, 그리고 롤은 미국에서도 솔직히 너무 많이 먹었기는 한데.. 일단 따라갔다. 니코니코라는 집이었는데 음식은 괜찮았다. 지난 시간 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피상적으로 송아에 대한 소식을 몇 번인가 접할 기회가 있었다. 가령, 내가 이민간 후 얼마 안되어서 수지로 이사를 갔다거나,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어디를 갔다거나 하는 '소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 5년 전에 한국에 왔을 때에도 송아네 아줌마를 뵙기도 했었고, 이 때도 송아를 보는 것이 왠지 부끄러워서 못 보기도 했었지만. 그에 비해 송아는 내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한국에서 우리 엄마와 친하던 아줌마들도 모두 소식을 잘 모르고 계셨다는 것을 이때 알았다고 해야 될까? 송아가 짐작하고 있던, 또는 들어왔던 지난 8년간의 나의 인생과 현실의 나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리고, 나는 이 왜곡된, 거짓되어 제작된 이 모조기억의 발원지가 나의 부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미국에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나와 준현이는 순진하게도 이 왜곡된 기억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날 송아와의 대화를 하면서, 나의 엄마와 아빠에게 적지 않은 배신감을 느꼈다..
8년 전의 나와 송아는 공통점이 많았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은행에 다니고 계셔서 영어시간에 가족 소개를 하는데도 공통적으로 "my father is a banker' 라는 문장이 들어갔었던 소소한 것부터, 같은 빌라 단지에 살았었고, 중학교 때는 나름대로 공부로 경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것은 모조된 기억일 수도 있지만, 중학교 2학년 때 그녀가 아마 부반장이 아니었었나 싶다. 내가 반장이었던 건 맞는데, 기억이 흐릿흐릿. 그럴 나름대로 인연을 강고하게 만들 기회가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때의 나는 왜 그렇게 그 녀석에게 못되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인연의 의미를 잘 몰랐던 걸까?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8년 사이의 공백이 생긴 것도, 다 내가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미 다 지나간 시간이니, 과거의 허물 정도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자.
식사를 끝내고 커피빈에서 경혜를 기다리며 여러 가지 얘기를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어린 시절의 우리 사이에 대해서 송아는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한 남자애들이 송아를 포함한 여자애들을 그렇게 괴롭혔는데도, 그 녀석은 그 것들을 모두 "친해서 하는 행동들"로 정의 내리고 있었다는 것에서는 내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물론 우리들이 적대감이 있어서 너네 들을 그렇게 대한 건 아니었겠지만 서도도, 글쎄...의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우리 반 남자애들과 여자애들 사이가 그렇게 좋았던 것 같지는 않았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얘기다) 이건 아마 인식의 차이이거나 내 기억의 모순일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여자애들과 그렇게 사이가 나빴다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아이들을 과연 보고 싶어 했었을까? 송아가 하는 나에게 그런 당연한 것들을 가르쳐 주는 듯 했다.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어린 시절의 내 기억 속에서 너는 호준이나 민국이 못지않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설령 너에게 호의를 가지지 않고 대했더라도,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너는 내 모습을 많이 기억해준 것 같다. 고마워라.
"너는 그 때 무슨 여자 혐오증이 있었던 것 같아."
나를 게이로 만드려는건가? 미안한데 나는 그 쪽 취향은 없다고! 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여자애들을 악의를 가지고 괴롭힌 적이 있었다.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집에서 받은 스트레스들을 잘못된 방법으로 발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를 생각해보면, 내 안에도 무언가 폭력적 요소가 내재되어있는 것 같은데,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나의 적대감과 폭력성은 모두 얼마 안 되는 특정의 인물들에게만 집중되어있다, 아마 당사자들은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점점 역설적으로 바보가 되어갔고, 사춘기가 끝날 무렵에는 남자다운 면이 없어진 것 같기도 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태를 본 송아는 나에게 "너 왜 이렇게 여자 같아졌냐" 라는 말을 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
프라이버시의 일이기 때문에 자세한 얘기를 쓸 수 없는 것은 슬프지만, 어쨌든 송아는 나라는 녀석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 것은 '과거의 나'라는 전제가 붙어있긴 해도, 누군가가 나를 이 정도로 기억해준다는 것은 분명히 기쁜 일이다. 미국에서 계속 지내며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인터넷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하기는 했지만, 송아와는 많은 연락을 주고 받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송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기억하는 것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누군가를 향해 일방적인 기억만을 가지고 있어서 그 기억의 조각이 맞물리지 않는 다는 것을 실감할 때, 사람은 시간의 벽에 좌절하고 그 누군가와의 관계를 백지로 돌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던가, 아니면 포기해야 한다. 나는 한국에 있는 동안 이런 것들을 느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나를 만나는 녀석들도 나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서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역시 8년은 짧지 않은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송아에게 고마웠다. 그런 감정을 단지 밥이나 술을 사는 것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국에 온 목적 중 하나는 예전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내 자신의 모습이 아닌, 제 2자나 3자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 그 것은 타인의 관점이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도 있고, 타인의 주관적인 관점이 들어감으로 인해 그 타인의 생각도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이 것도 시간의 흐름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이겠지. 현재의 그녀와 나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너무도 다른 입장에 서 있었다. 과거의 얘기를 하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현재나 미래의 얘기에서는 그 것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송아라는 녀석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격이 변한 것일 수도 있고, 그냥 나의 둔감함이 멋대로 그 녀석의 성격을 정의해버렸던 것일 수도 있지만, 새롭게 안 송아는 약간의 벽이 있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치관과 성격 같은 것도 많이 다른 것 같았는데, 이는 위화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와 송아의 인연의 끈은 그 녀석 쪽에서 먼저 잡아 주었다. 나에게 있어 그 소중한 시발점은 지금 와서는 그 녀석에게 있어 하찮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너에게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번 감사해.
곧 경혜가 왔다.
송아와의 사진은 사실 다른 날에 찍은 것이었다
#_경혜의 미소
초등학교 때 내가 기억하는 경혜의 모습은 멜빵바지를 자주 입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내가 기억하는 경혜의 모습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 것은 경혜의 웃는 모습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 것에 대해서 잘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미국에 있던 시절에도 어쩌다가 장안초등학교 졸업앨범을 열거나 친구들의 미니홈피에서 백경혜라는 이름 세 글자를 발견했을 때, "아.. 백경혜" 라며 늘 그 해맑게 웃는 얼굴을 기억하곤 했다.
그런 경혜를 커피빈에서 마주쳤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아.. 여전하네ㅋㅋ" 였다. 그래도 역시 좀 어색했던 것일까. 삼자대면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반에는 나와 경혜의 대화가 송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경혜는 내가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바로 알아봤다고 한다. 변하지 않은 내가 도대체 어떤 난데? -_-;; 그리고 보면, 나는 여자아이들과는 그렇게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것 같지 않다. 송아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말발로 여자를 이기는" 그런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했었는데, 실제로 여자애들을 말로는 이겼지만, 절대 지지 않는 녀석이 바로 경혜였다. 내가 뭐라고 한 마디를 하면 두 세 마디를 하면서 받아 치기도 했고, 또 거기다가 항상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나는 왠지 심리적으로 경혜에게 위축되어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적대감이 아니다. 지금의 경혜는 분명히 다 까먹은 것 같지만, 나는 왠지 어릴 적 내가 경혜를 포함해 여자애들에게 했던 심한 말들이 다 생각나는 편이다. 물론 심한 악의가 있어서 그렇게 대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 녀석들이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나는 사과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라는 염려를 했다. 특히 경혜에게 한 말이 아직도 생각나고 있었다.
다만, 그 녀석들은 모두 까먹은 것 같다. 송아도 나에게 괴롭힘 당한 것들을 알고 있지만 단편적인 기억들뿐이었고, 경혜는 말 그대로 거의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다. 그 것은 다행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과할 대상을 잃었다는 나에게는 커다란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대상을 잃었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하찮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에 뇌의 기억용량을 할당하기에는. 제대로 사과하려고 했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잊혀져도 괜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커피샾을 나와 노래방을 가자고 말하다가, 그냥 술을 마시기로 했다. Garten Bier라는 곳이었는데, 식탁에 병을 차게 식힐 수 있는 냉각기가 정말 참신했던 것 같다. 이 날을 시작으로 미국에 돌아오기 전 까지 꽤 자주 갔던 곳이고, 안주도 맛있었으며, 직원들도 너무 친절했다. 대화의 주제는 나의 변화에 대한 것으로 시작했다. 경혜와 송아 모두 10년 넘게 알아온 친구들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이런 얘기들을 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처음으로 진솔한 대화들을 할 수 있는 날이었다. 즉,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이었는데, 아이들은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중학교 2학년 이후 한국에서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 시간은 그 때로 멈춰져 있었고, 송아와 경혜는 계속 한국에서 자신들만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 내가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에서의 기억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과 달리, 그녀들은 계속 다른 일들이 있었고, 또 다른 인연들을 만나왔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그 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과거의 기억들에 의해 점차 멀어지고 있었나 보다.
어쩌면 이 때까지도 송아와 경혜가 조금은 어색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것은 차라리 모르는 사람들을 만난 자리라면 그렇지 않았겠지만, 왠지 같이 있으면 있을 수록 어렸을 때의 생각이 많이 났다. 그 때의 나는 여자애들과 이야기할 때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고, 한 테이블에 앉아서 얘기하는 것 같은 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부끄럼을 많이 탔다. 그런 것들이 가능한 친구는 아마 내 기억에 털털한 미정이밖에 없었다. -_-;; 테이블에 앉으려는데 경혜가 반대편에 앉고 나와 송아가 맞은편에 앉았다. 자꾸 얼굴이 빨개지면서 가장자리에 엉거주춤 앉으니 송아가 핀잔을 준다. "좀 가까이 와서 앉아 엘리야." 너는 나 철가루라고 부르지 않았었니? 자꾸 어린 시절의 생각이 난다. 내 앞에 경혜가 앉아서 나를 보고 얘기하는 것도 무언가 불편했다 ㅠㅠ 뭐,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둘 다 괜찮아졌으니, 아마도 내 기억의 시계가 그냥 중학교 때 멈춰진 상태로 일시적 장애를 일으켰다고 생각하자. 이 때 결국 담배 피우는 것을 실토하고 웨이터에게 재떨이를 가져달라고 했더니 둘 다 나에게 엄청난 눈치를 준다. 아 어려워 죽겠네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 녀석들과 초등학교 때 보다는 비교적 중학교 때 많은 접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윤신이에 대한 것이었다. 장윤신, 나와는 2학년 때 오랫동안 짝이었던 친구다. 당시에는 비교적 작은 키에 앳된 외모로 덕분에 여자애들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짝이었던 나는 윤신이를 많이 괴롭히고는 했는데,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미안해 죽겠다. ㅠㅠ 경혜는 그때도 송아와 유진이와 친하게 지냈었는데, 나는 분명히 얘네들이 윤신이를 많이 괴롭혔던 걸로 생각했는데, 송아는 이렇게 말했다. "그 때는 우리가 걔 얼마나 많이 놀아줬는데!" 윤신이가 정말 착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를 포함한 일부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은 자기들 보다 작은 윤신이를 정말 많이도 괴롭혔다. 물론 제일 많이 괴롭힌 것은 어쩌면 짝이었던 나였는지도. 윤신이에 대한 기억들을 헤아려보다 그리운 다른 이름들도 기억났다. 이보배와 이샘. 잘 지내니? 한국에서 윤신이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연락을 해서 다행이었다. 미니홈피에 가보니 그 녀석은 정말 멋있는 녀석이 되어있었다. 내년엔 꼭 볼 수 있기를.
내 앞에 앉아 있는 경혜는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 계속 웃고 있었다. 어릴 때는 그 웃음이 왠지 나를 깔보는 것 같다는 생각에 경혜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지만, 왠지 항상 당하는 것은 나였다. 그 것은 웃음의 의미를 이기적으로 해석해 버린 나의 업보. 분명히 똑같은 미소를 보고 있는데도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그 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달랐다. 지금의 나는 그 웃음을 보며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의 나는 성격적으로 무언가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내일 아침 일찍 가평을 간다는 나의 말에 경혜가 한마디 했다. "너 근데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냐? 내일 일어날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긴 한숨을 쉬면서 "몰라.." 라고 대답하는 것뿐이었다.
경혜와 송아 모두 학교를 다니는 중이라 바쁜 것 같다. 이 시점에 경혜는 유진이처럼 과외의 스케줄도 있었고, 송아도 곧 다시 바빠질 것이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송아는 사람들이 자기를 쉬운 여자라고 부른다고 했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의미의 쉬운 여자가 아니라 아무 때나 부르면 잘 나온다고. 하지만, 이후에도 송아를 만나기 위해 여러 번 연락을 했는데, 그 때마다 스케줄이 있어서 나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스케줄이 취소된 날이나 계획이 없는 날에 뜬금없이 전화를 하면 항상 나와주었다. 이상한 여자 -_-
둘 다 바쁜 스케줄이 있었고, 나도 다음 날 가평에 가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이쯤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워낙 바쁜 처자들이라 앞으로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 조금 더 붙잡으려고 했지만, 불가능한 것 같았다. 송아를 통해 송아 아줌마에게 안부 인사를 드리고 녀석들을 버스정류장에서 보낸 뒤, 귀가했다. 만약, 예전의 내가 조금 더 숫기가 있고 상냥한 녀석이었다면 최소한 송아와 등하교는 같이 해서 더 친해질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우리의 동선은 99.9%가 같았으니깐.
나중의 일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경재네 집에서 살 동안 저녁 시간에 걸을 수 있는 거리에서 혜화나 한이, 아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면서도 당연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마치 나에게는 꿈 같은.
나는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리라. 세계의 답으로 이어지는 지금, 그리고 내일을. - Frederica Bernkas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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