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억/2009, 한국 49재 (完)

꿈에서 깨어, 기억을 걷는 시간을.. - 090724

by 스프링데일 2009. 11. 17.
1800 PC방가서 대학교 원서
1900 UCSD Application
2100 나무미술과 예전 살던 집을 걸어가봄
2130 미국에 전화
2200 영중이랑 게임

분당동

지금 와서 돌아보아도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은 마치 꿈을 꾼 것 같이 느껴진다.  아직도 기억나는 사람들의 얼굴과 그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얽혀있는 몽환 속에 빠져 미국에 돌아온 지 세 달이 지난 지금도 종종 현실을 망각하곤 한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미국에 남겨둔 내 일과 기억들을 신경 쓰지 않는 동안에는 내가 꿈 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마치 그런 자각몽 같은 즐거움에 매일 매일을 보낼 수 있었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만나기로 약속했던 친구는 가족에 급한 일이 생겨서 전 날 계획을 취소해달라고 하였고, 나는 공교롭게도 그 날 내가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말았다.  가능하면 영원히 잊어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저녁 때쯤까지 집에서 '로마인 이야기’를 읽다가 근처의 PC방으로 직행.  다른 날 같았으면 게임을 했겠지만, 나는 대학교 원서를 썼다.  PC방에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다른 이유로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UC Application 사이트를 키고 UCSD에 편입원서를 작성하기 시작.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번에도 UCSD에서는 나를 받아주었다.  물론 이 결과는 내가 미국으로 돌아오고도 두 달이 지나 10월쯤 알게 된 결과이지만, 나는 대학교에 갈 여력이 없었다.  다시 한번 합격증을 내 손으로 찢어버리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대학교 자체에는 미련은 없지만, 적어도 아직 내가 공부를 하는 쪽으로 인생의 길을 돌리더라도 많이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튼, 이건 뭐 나중에 일어난 일이고.

원서들을 어느 정도 작성해놓고 가까운 시일 내로 도서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 미국에서의 할 일이 생각난 김에 사장님께도 전화를 드리고 집에도 전화를 걸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나는 정연이에게 전화를 걸고, 경재네 집 근처에 내가 잠깐 동안 살던 옛날 집과 어릴 때 다니던 나무미술 학원의 앞까지 가보았다.  그 집은 아직도 예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비록 내가 밤에 보고 있었지만 이 곳에 있었던 나의 옛날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집의 입구에 서서 학원 선생님의 가족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작은 현판을 바라보며, 10년 전 같은 자리에 서 있을 과거의 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이 곳은 어쨌든 정연이를 처음 만난 곳이다.  인연의 시발점이며, 그 인연은 이후에 끝나게 되지만 어쨌든 이후에 일어나는 어떤 한가지 일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내가 이 학원을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년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결국 내 자신이 과거에 새겼던 발자취를 추적하는데 한 번은 성공할 수 있었다.  기억나는 과거의 시간대에 존재하는 어느 한 점을 확실히 할 수만 있다면, 비록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더라도 나의 마음만큼은 그 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의 정신적 리셋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게임에서는 진행 도중 한 부분을 저장해놓고, 그 뒤의 진행에서 실패를 할 경우 돌아오고는 한다.  나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지만 돌아올 수 있었다.  예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재를 걸어갈 수 있다면, 허송세월 보냈다고 생각하는 시간들도 충분히 의미 있게 보낸 것이며, 남들보다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앞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스스로에게 내포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번 이 날이 올 수 있다면, 남들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잡아보겠다고 이 글에서 내 자신에게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