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 UCSD Application
2100 나무미술과 예전 살던 집을 걸어가봄
2130 미국에 전화
2200 영중이랑 게임
분당동
지금 와서 돌아보아도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은 마치 꿈을 꾼 것 같이 느껴진다. 아직도 기억나는 사람들의 얼굴과 그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얽혀있는 몽환 속에 빠져 미국에 돌아온 지 세 달이 지난 지금도 종종 현실을 망각하곤 한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미국에 남겨둔 내 일과 기억들을 신경 쓰지 않는 동안에는 내가 꿈 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마치 그런 자각몽 같은 즐거움에 매일 매일을 보낼 수 있었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만나기로 약속했던 친구는 가족에 급한 일이 생겨서 전 날 계획을 취소해달라고 하였고, 나는 공교롭게도 그 날 내가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말았다. 가능하면 영원히 잊어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저녁 때쯤까지 집에서 '로마인 이야기’를 읽다가 근처의 PC방으로 직행. 다른 날 같았으면 게임을 했겠지만, 나는 대학교 원서를 썼다. PC방에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다른 이유로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UC Application 사이트를 키고 UCSD에 편입원서를 작성하기 시작.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번에도 UCSD에서는 나를 받아주었다. 물론 이 결과는 내가 미국으로 돌아오고도 두 달이 지나 10월쯤 알게 된 결과이지만, 나는 대학교에 갈 여력이 없었다. 다시 한번 합격증을 내 손으로 찢어버리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대학교 자체에는 미련은 없지만, 적어도 아직 내가 공부를 하는 쪽으로 인생의 길을 돌리더라도 많이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튼, 이건 뭐 나중에 일어난 일이고.
원서들을 어느 정도 작성해놓고 가까운 시일 내로 도서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 미국에서의 할 일이 생각난 김에 사장님께도 전화를 드리고 집에도 전화를 걸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나는 정연이에게 전화를 걸고, 경재네 집 근처에 내가 잠깐 동안 살던 옛날 집과 어릴 때 다니던 나무미술 학원의 앞까지 가보았다. 그 집은 아직도 예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비록 내가 밤에 보고 있었지만 이 곳에 있었던 나의 옛날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집의 입구에 서서 학원 선생님의 가족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작은 현판을 바라보며, 10년 전 같은 자리에 서 있을 과거의 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이 곳은 어쨌든 정연이를 처음 만난 곳이다. 인연의 시발점이며, 그 인연은 이후에 끝나게 되지만 어쨌든 이후에 일어나는 어떤 한가지 일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내가 이 학원을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년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결국 내 자신이 과거에 새겼던 발자취를 추적하는데 한 번은 성공할 수 있었다. 기억나는 과거의 시간대에 존재하는 어느 한 점을 확실히 할 수만 있다면, 비록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더라도 나의 마음만큼은 그 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의 정신적 리셋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게임에서는 진행 도중 한 부분을 저장해놓고, 그 뒤의 진행에서 실패를 할 경우 돌아오고는 한다. 나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지만 돌아올 수 있었다. 예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재를 걸어갈 수 있다면, 허송세월 보냈다고 생각하는 시간들도 충분히 의미 있게 보낸 것이며, 남들보다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앞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스스로에게 내포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번 이 날이 올 수 있다면, 남들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잡아보겠다고 이 글에서 내 자신에게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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