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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2009, 한국 49재 (完)

다녀가신다 - 090815

by 스프링데일 2011. 1. 10.
1100 규식이형네
1500 할머니댁
1600 물놀이
1800 저녁식사
2000 노래방
2200 음주
2800 취침

명장동 -> 해운대 -> 경상남도 밀양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겨울이라면, 그 곳도 겨울일까.
작년 내가 있었던 곳이 여름이었다면, 그 곳도 여름이었을까.
지금 나는 이 곳에 있는데, 왜 그 분은 그 곳에 계시지 않은걸까.

つひに行く道とはかねて聞きしかど昨日今日とは思はざりしを

5년 전의 부산에 비해 이번 부산 방문은 친척 분들을 모두 만나고 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초등학교 때 이후로의 기억이 나지 않는 가장 위의 큰엄마 - 즉 규호, 규식이형의 어머니 - 부터 해서 많은 어른들을 뵐 수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혈연을 찾게 되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재미있는 점이다.  나는 부산의 친척 어른들과는 그다지 가깝지 않다.  거리감부터 해서 여러가지 요소들이 작용한 것이리라.  그래도 큰엄마께서는 수 년만에 찾아온 당신의 조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신다.  큰엄마는 이제 얼굴빛이 조금 좋아지셨다.  시간의 흐름은 사람을 무뎌지게 해준다.  그리고 사람의 기억을 잊혀지게 해준다.

오랫만이었지만 짧은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밀양의 할머니댁으로 향하게 된다.  큰엄마와 헤어지는게 내심 아쉬웠지만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나는 큰엄마와 친해질 기회를 이날 이후에 다시 가질 수 있었다.

스카이뷰 찾느라 힘들었다. (출처: Daum View)

그리고 밀양.  한국에 오고 첫 날에 뵈었던 친할머니.  그리고 나서도 며칠을 함께 했었던 친할머니.  이 쪽 동네에서는 통나무집 할매라고 통하시는 듯 하며, 작지 않은 부지위에 세워진 2층의 통나무집.  우리 할머니가 사시는 곳이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쯤이었을 때 할머니는 석수동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때가 1996년... 그리고 내가 미국에 간 것이 2002년이다.  즉 내가 이 곳에 와 보는 것은 7년 반만의 일, 그리고 할머니는 14년 정도를 이 곳에서 사셨을 것이리라.  집이 아무리 멋이 있으면 뭐하랴.  할머니는 이 곳에서 십 수년을 혼자서 보내시며 이곳 저곳을 다 일구셨다.  한국 체류의 처음과 끝에 할머니가 계셨다는 생각을 하며 기억에 있던 그 집의 대문을 열었다.

며칠 동안 우리를 위해 수고해 준 규식이형

7년 만에 온 통나무 집, 그리고 그 집까지의 길은 약간의 변화가 있다.  우선은 부산에서 밀양까지 가는 방법일까.  새로운 도로가 생겼기 때문에 길게 잡아도 두 시간이 걸리지 않고 밀양에 도착했다.  이걸로 적어도 부산의 친척들은 밀양의 할머니를 뵈러 갈 때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주변의 모습.  흙으로 덮여있던 대문까지의 길은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포장이 되었고, 이전에 있었던 집들이 없어졌나 하면 새로운 집이 생겼다.  그래도 이 마을에선 우리 할머니 집이 가장 으리으리했던 것 같은데, 바로 옆에 생긴 커다란 기와집이 눈에 띄었다.  들리는 말로는 부산대학교에서 학장을 지내셨던 분이 집을 지으셨다고 한다.  귤빛의 기와들이 정사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는 집.  꽤 내 시선을 이끌었지만, 그래도 왠지 할머니의 통나무집 옆에 이런 멋진 집이 들어섰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역시나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그 사이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고모와 할머니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정도로 두분 모두 건강하셨다.  석수에서와 마찬가지로 할머니는 당신의 손자와 손녀들을 맞이하기 위해 밖에 나와계셨다.  항상 그러셨던 할머니.  그래서 나는 언제나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상상했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다음은 없었다.



# 謹弔

나리누나가 찍어준 나와 준현이, 규식이형, 할머니, 고모

계획대로라면 한국일기는 작년 여름까지는 끝났어야 하는게 맞다.  하지만 바쁜 학교 생활과 직장으로 인해 점점 글을 올리는 싸이클이 늦어지면서 이제는 새로운 일기를 올릴 때마다 여러가지 만감이 교차하곤 한다.  이날 방문했던 밀양은 2009년의 할머니 댁을 방문했을 때이다.  만약 내가 2010년 초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 일기를 끝낼 수 있었다면 이 글에는 할머니의 부고에 대한 소식을 담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즉, 나의 게으름과 바쁜 스케줄로 인해 슬픈 이야기들을 기록해야만 하는 현실이 글을 쓰는 현재의 시점으로 부작용처럼 작용한다.  할머니는 더 이상 나와 같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  단순한 거리적 차이점이 아닌 생과 사의 기로에서.  모든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시간 위를 달려간다.  그 시간의 끝에 누구나에게 찾아오는 것은 죽음.  그리고 아마도 삶의 진리라는 것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나의 무력함에 눈물이 나온다.

# 追慕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것이 죽음이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은 없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평등한 권리.  나에게도 그런 권리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죽음이라는 것을 정할 수 있다면, 아마도 죽음의 방법이 아닐까.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죽음이란 무엇일까.  아무리 머릿속에서 뇌까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생과 사의 경계 속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을 만든다.  떠난 사람은 無가 되지만, 만약 남겨진 사람들이 떠난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것은 진정한 無는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할머니를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할머니의 존재가 남겨진 사람들 속에서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잠시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아직 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무렵 7년 만에 들렸던 밀양은 나에게 새로웠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시골 풍경들은 한 때 나에게 익숙했던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질감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듯 했다.  다리 밑의 개울가.  그 곳에 도랑을 치고 가재를 잡거나 어망을 치고 피리나 송사리를 잡는 것.  물가에는 실잠자리나 물잠자리가 있다.  검은 날개를 가진 물잠자리.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적 곤충이나 벌레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무서워 했던 것이라면 사마귀나 나방 정도가 아니었을까.  개울이 아니라 잔디밭에서도 방아깨비나 메뚜기들을 심심치않게 잡기도 했고 개구리나 두꺼비도 잡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보고도 도망다녔다.  미국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물잠자리를 볼 때면 예전의 기억이 나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 녀석들을 맨손으로 잡지 못한다.  그 외에도 이 곳에는 돗자리에서 햇볕을 받아 빨개지고 있는 고추나 대나무숲, 그리고 닭장 같은 여러가지 내가 기억하는 "한국적인" 모습들이 많이 남아있다.  잃어버린 것은 아마도 곤충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닐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나리누나

역시 가장 가까운 친척들

저녁으로는 갈비찜과 찹쌀을 넣은 삼계탕이 나왔다.  미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  역시 나는 잊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추억했던 한국은 사실 극히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음식점에서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만, 전통적인 모습은 이상하게도 찾아보기 힘들다. 

여름이었는데도 밖의 해가 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식사 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한 것 같다.  할머니와 고모는 외국에 있다는 것을 핑계로 연락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나와 동생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만 보실 뿐이다.  기억해보면 이 시점에서 할머니께서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다.  "우리 성현이 준현이, 공부 열심히해서 훌륭한 사람 되어야지.  할매 이제 얼마 못 살 것 같다."  정정하신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니 송구스럽기까지 했다.  "에이~ 할머니, 어차피 내년에도 또 올 건데 그런 섭섭한 말씀 하지 마세요 ㅠㅠ"  아마도 이 시점에서는 할머니께서도, 우리로서도 이후에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실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마치 초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처럼 나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고, 할머니와 고모, 규식이형, 그리고 나리누나에게 얼마든지 귀여움을 받았다.  그 것은 나로 하여금 오랫만에 가족애를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아서 너무나 따뜻했지만, 결국 마지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 집에는 할머니도 안 계시고, 그 집도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것 같다.

한 달 전쯤부터 이 글을 쓰려고 계속 몇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지만, 어떻게 해도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  8월 14일까지의 일기는 그저 좋은 기억들에 대한 기록들이었다.  물론 8월 15일의 일기도 그렇게 될 예정이었지만, 이제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적는 것조차 죄스러움과 어색한 기분이 든다.  분명히 다른 어떤 날보다도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 2009년 8월 15일은 그 일기를 쓰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마음 속에 있는 감정이라는 녀석은 분명히 슬픔과 그리움으로 가득한데, 글로써 잘 표현이 되지 않는다.  그 동안 블로그에 노래 가사 같은 내 글이 아닌 것들을 올린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할머니를 뵈었던 날, 그리고 친척들과 함께 했던날에 느꼈던 나의 감상과 추억들을 어떻게든 기억속에서 꺼내 아름다운 일기를 쓰고 싶었지만 그 것이 불가능 하다는 사실은 내게 곧 무력함으로 찾아왔다.  글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진다는 것, 그 것은 추억을 머릿속으로만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나는 기록을 남기려고 최선을 다했다.  최소한 이렇게 글로 남겨둔다면 나는 언젠가 이 글을 다시 읽어볼 것이다.  그 때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새긴다는 것, 그 것만으로도 적어도 할머니는 이 세상에는 계시지 않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언제까지고 살아 계시리라 믿는다.

그렇게 할머니께서는 이 세상을 다녀가신듯 하다.


四大假合
今將返眞
何用屑屑往來
勞此幻軀
吾將入滅

훍과 물, 불과 바람이 모여서 된 이 몸
이제 참된 나로 돌아가노라.
무슨 까닭에 부질 없이 왔다 가면서
이 허깨비 같은 몸을 수고롭게 하리오
나 이제 멸도에 드노라.

다녀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