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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비망록

허리에 맞지 않는 바지

by 스프링데일 2013. 10. 14.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torrentor/173376327

수년 전부터 하나 둘씩 사모았던 트루릴리전 바지들.  어느 순간부터 찢어지고 구멍난 곳이 많아 입을 수 없게되어 나중에 수선하기로 마음먹고 옷장 한 구석에 재워놓았던 내 바지들.  당시의 나에겐 정말 큰 돈을 주고 샀고, 따라서 몇개 되지 않는 바지들이었지만 이제는 돈을 벌게 되면서 한 벌에 200불이 넘어가는 수선을 하려고 바지들을 꺼냈고, 뉴욕에 있는 어떤 수선업체에 위탁하려다가 엄마가 근처에 싸게 아는 곳이 있다고 해서 그냥 엄마에게 맡겼다.

실수였다.  한번이라도 입어보고 맡기던지 말던지 했어야하는데, 수선되어서 온 내 바지들은 내 몸에 맞지 않았다.  평균적으로 허리 둘레를 29~31 정도에서 입었던 녀석들인데 오늘 입어보니 바지는 골반 근처에 걸려있고, 하반신은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돈 낭비.  으이구ㅋ 멍청한 김성현아..ㅋㅋ  사실 올해 초 일을 시작하고나서 살찌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9월쯤 처음 척추교정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할 때 처음 잰 몸무게는 내가 25파운드가 쪘음을 알려주었고, 사실 그전에도 비슷한 조짐들은 것들은 있었다.  옆구리에 살이 잡히고, 올챙이배가 되어있었다.  가끔 대학교에 후배들을 보러 놀러가면 오빠 올챙이배가 됐다며 이젠 아는 척도 안해준다.  적당한 뱃살은 부의 상징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런 모습을 그다지 원하지는 않았다.  일단 마른 체형과 뚱뚱한 체형이라는 나는 닥치고 전자를 고를 것이다.

그리고 오늘, 주유소에 나가려고 엄마가 수선해온 바지를 입으려 하는데, 바로 위와같은 사단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아... 내가 살이 찌긴 했나보다.. 좆돼지 김성현ㅡㅡ

누구에게나 자신이 선호하는 옷이나 악세사리의 패션이 있고, 나에게도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었다.  그 스타일은 꽤 오랫동안 비슷한 형태로 존재했는데, 넥타이, 목걸이, 팔찌, 와이셔츠, 가디건, 그리고 트루릴리전 바지들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주변 친구들보다 상대적으로 궁핍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인지 열등감 같은 것들도 있었고, 그 열등감들은 나에게 한 가지의 목적의식을 만들어주었다.  "옷은 비싼 것을 입고 싶다."  물론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이었던 내가 융통할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었고, 사실 남들이 말하는 그 흔한 명품조차 가질 수 없었지만, 뭐 내가 가진 것들 중에 그나마 비쌌던 것이라면 디젤이나 에너지, 트루릴리전 정도였을 것이다.  이런 내 패션을 본 주변 녀석들의 평가는 간단했다. "게이같애"  그리고 학교를 다니면 다닐 수록 알바할 시간이 줄어들어서 옷을 사는 것은 이후로 나에게 사치가 되어버렸다.  이후는 예전에 사두었던 옷을 계속 입는 것 뿐이다.  실제로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옷들 중에선 10년 된 녀석도 있으니깐.. 비록 잠옷으로 쓰긴 하지만.

그러나 짧지 않은 시간동안 유지했던 이런 스타일들은 올해 초 내가 입사하게 되면서 달라져버렸다.  처음 하는 직장생활이라는 기대감에 H&M에서 면바지들과 셔츠, 그리고 블레이저를 몇개 샀다.  (이미 이 시점에 내가 비싼 브랜드의 옷을 사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옷들을 입고 다니길 몇 달, 미국 회사의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모두 옷을 편하게 입고다닌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이후로는 내 패션은 존재하지 않는다.  셔츠, 남방, 스키니 면바지, 그리고 트레이닝 점퍼.  딱히 옷을 사러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을 만나거나 하면 조금은 신경쓰이겠지만, 내가 외모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 과거에는 옷이나 장신구였다면, 지금은 마사지도 받으러다니고 접골원도 다니고, 가끔 엄마랑 스킨캐어도 받으러 다닌다.  누구하나 보여줄 사람은 없지만, 왠지 이렇게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그 옛날의 나는 비싼 옷을 사고 싶어서 시급 8~10불짜리  알바를 몇십시간을 해가면서, 배고픈데 밥 먹는 돈을 패스트푸드로 아끼며 돈을 모았는데, 지금 나는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어져버렸다.... 관심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목숨 걸고 옷을 사려고 하지는 않는다.

만날 사람이 줄어들어서 그런걸까, 이제는 내가 보는 사람들이 맨날 보는 사람들이어서 그런걸까?

이제는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되면서 어느 정도 스스로에 대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지난 10여년 간의 시절을 약간이나마 잊어가고 있다.  입고 싶은 옷을 못 입고,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고, 가고 싶은 곳을 못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못 만났던 시절들은 이제는 어느덧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주급으로 들어오는 돈은 나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주고, 금전에 대한 걱정을 무디게 해준다.  카드빚이 달러로 다섯 자리의 숫자를 찍었을 시절, 나는 그 숫자들이 너무나 많아서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화성의 올림푸스 산과 비슷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나와는 무관할 뿐.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경외감부터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예쁜 옷, 맛있는 음식, 경치 좋은 곳, 멋진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내게는 모두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돈 때문에 스스로를 움츠렸어야 했던 기억들은 이들 말고도 수 없이 많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살이 찌지 않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냥 밥 사먹을, 밥 해먹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인가는 삼일 내내 굶고 스트레스에 잠도 많이 못자서 학교를 가려고 현관을 나서다가 그 앞에서 쓰러져 정신을 차려보니 한밤 중인 적도 있었고, 정말 돈이 없을 때는 일주일을 라면 다섯개로 보낸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눈물 나는 나날들이지만, 돌이켜보면 나 말고도 이런 일들을 겪은 녀석들은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깐 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내가 느낀 빈곤은 상대적인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 외의 요소들도 아마 비슷한 것들이었을까?

아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돈과 상관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실은 그냥 내가 그렇게 기준을 정했을 뿐이었다.  돈 있으면 할 수 있는 일과 돈 없으면 할 수 없는 일.  스스로 만들어 놓은 제한선이나 구분선 같은 것에 의해 스스로의 피해의식을 정당화시키고 있었지만, 사실 그런건 무의미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지금의 나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돈이 없었던 그 때, 소중한 녀석들이 내 옆에 수두룩했던 그 때가 조금은 그립기도 하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뿐이고,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바지가 허리에 맞지 않게 된 것처럼, 점차 내가 과거에 두고온 것들은 지금의 나에게 맞지 않는 모습이 될 것이다.  사실은 그 녀석들은 그냥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채였지만, 내가 바뀌어 가는 것이다...

그러니깐 문제는 없다.....
지금 주어진 삶이나 열심히 살자.. 심심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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