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정치/사회/외교

중국 측이 공개하는 한중수교 회담 비사

by 스프링데일 2009. 10. 19.
출처: 동관한국상공회   
날짜: 2007-07-14 13:08:27

한중 수교 15주년이 40일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중국측에서 양국 수교 비사가 공개되고 있다. 

한.중 수교 회담 당시 실무협상대표단의 일원이었고 초대 주한 중국대사를 지낸 장팅옌(張庭延)은 베이징(北京)에서 발행되는 세계신문보(世界新聞報)에 연재중인 중.한수교시리즈에서 수교협상의 전모를 밝혔다. 장 전대사는 12일 현재 2번까지 나온 시리즈에서 한중수교의 필요성을 먼저 느낀 측은 아시안게임 개최를 간절히 원한 중국이었다고 털어놓았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유치를 위해선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이사국이며 아시아 스포츠강국인 한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수적이었다는 것.

다음은 시리즈의 요약이다.

중국은 각종 국제 행사에서 한국과의 교류에 활발히 나서면서 86서울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후 1992년 첸치천(錢其琛) 당시 중국 외교 부장의 방한으로 한.중수교의 중요 전기를 마련했다. 노태우(盧泰愚)당시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제3차 장관급 회의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첸 부장을 별도로 접견, 한.중 관계 수교의 희망을 피력했다.

APEC 회원 가입을 위해 중국 외교총수가 50년간 적대국이던 한국을 방문한 것도 이례적이어서 한.중 관계 변화 가능성을 놓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노대통령이 첸 부장을 단독 접견한 것도 파격적이어서 수교 협상 분위기는 무르익었음을 시사했다.

한국은 이미 1983년 국내에 불시착한 중국 민항기 사건과 1985년 어뢰정 사건를 신속하게 처리하며 수교를 원하는 중국 측에 화답했다. 

수교 협상의 물꼬를 튼 것은 1992년 4월 이상옥 외교장관의 중국 방문.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명분이었지만 사실상 양국 수교협상을 위한 외교장관 회담이 방중의 주목적이었다.

이상옥 장관과 첸 부장은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열린 회담에서 수교 협상 착수에 합의했다. 양측 실무대표단은 수석대표는 차관급으로 하고 부대표는 대사급으로 하기로 했다. 이밖에 대표단원은 각각 6-7명선이었다.

한국측 수석 대표는 노창희 차관, 부대표는 권병현 대사로 구성됐고 중국측은 쉬둔신(徐敦信) 부부장과 장루이제(張瑞杰) 대사가 각각 수석대표와 부대표를 맡았다.

양측 대표단은 92년 5월과 6월 베이징 댜오위타이 14호각에서 각각 1,2차 협상을 한데 이어 3차는 서울로 장소를 옮겼다.

한국측은 수교 협상 진행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노태우대통령과 청와대 외교 안보 수석, 그리고 외무장관등 3명에 불과할 정도로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

한국측 회담 대표단은 회담이 없을때도 댜오위타이 밖을 나선 적이 없고 베이징에 출장올 때 가족에게 행선지를 비밀에 부쳐 부인들은 여름철과 겨울철 옷을 모두 챙겨줘야 했다.

수교 협상의 큰 걸림돌은 역시 대만문제와 북한 문제였다.

한국은 곡절끝에 마침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고 대만과 단교하기로 했다.  중국은 빠른 시일내에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바라는 한민족의 염원을 존중하고 한민족 자체적인 평화통일을 지원키로 했다.

중국은 한.중수교발표이전에 첸치천 부장을 평양에 파견, 고 김일성 주석에게 수교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했다. 첸치천 부장은 10대 외교비사라는 회고록에서 당시 김일성 주석이 침통해했던 사실을 밝혔다.

반면 한국은 대만에 한.중 수교 사실을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로 했고 마침내 막판에 이를 눈치챈 대만측이 한.중 수교 이틀전인 92년 8월22일 먼저 한국과 단교를 선언했다 

한중수교 직전까지 대만과 중국의 관계는 한국과 북한의 그것과 비슷했다.  이념의 차이로 인해 서로의 입장이 양립할 수 없는 현실아래 공존하고 있는 국가들.  하지만, 특정 국가를 국가로 인정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대만, 중국, 한국, 북한은 각 독립된 '국가'의 개념이다.  즉, 한국이 아무리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더라도, 대만과의 외교를 중국 만을 통해서 하지는 않는다,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한중수교당시에 나는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의 나이이기 때문에 당시의 정확한 정황은 모른다.  그저 내가 어느정도 글자를 읽을 수 있고 국제정치외교에 관심을 가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 당시에 씌여진 글들을 읽고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201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의 국제 정세만을 고려한다면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 것은 분명히 잘한 행동이다.  내가 논하고 싶은 것은, 그 수교의 방법이었다.

위에 인용한 기사에도 씌여있지만 중국은 남한과의 수교이전에 북한에 미리 통고하였다.  소련 시절에 만들어진 두 나라의 관계가 돈독하긴 했지만, 그거랑은 관계없이 중국은 북한에 '명분상의' 예의를 최대한 차려주었다.  그 반면에 한국은 도데체 대만한테 무슨 행동을 했는가.  자유진영의 한 국가인 남한이 공산권의 중국과 수교를 함에 있어서 분명히 공개적으로 수교 과정을 진행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한국은 이미 미중수교라는 선례를 보지 않았던가.  당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생각한다면 미국이 공표했던 대만 관계법 같은 것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 단교 후 대만한테 꼬투리잡힐 짓을 해서는 안되었다.

대만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극비로 한중수교를 진행한 것은 좋다.  하지만, 그러면 끝까지 잘 비밀로 몰고 갔어야지.  한중수교과정에서 노태우정권이 다른건 다 잘해놓고 왜 이 부분만큼은 마지막까지 비밀을 지켜내지 못한걸까?  아니면 어차피 대만은 언젠가는 중국에 흡수 합병될테니 그냥 놔두어도 된다고 나라의 높은 분들이 생각하셨던 것일까?

여하튼 대만은 이제는 거의 전세계에서 '외교적'으로 무시당하는 수준까지 내려왔지만, 그나마 중소기업 기반의 중고급 전자기술로 먹고살고 있다.  언젠가는 일본과 한국의 하청업체가 되거나 중국의 기업이 되어버리겠지만, 아직도 중국 본토의 '하나의 중국'을 거부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는 나라다.  지금은 중국의 세력이 커졌으니 국제적으로 대만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나는 적어도 대만인들의 이런 자주성이나 정체성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한다.  그래도 지금 천수이볜씨도 수감당하시고, 어쩌면 진짜 중국의 대만섬이 되어버릴 지도 모르겠구나.

동북아시아 외교에 대해서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분명히 '하나의 중국'은 굳이 알기 쉽게 설명을 하자면 중국 본토의 공산당 이외에 다른 세력이 중국을 대표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만과 중국 양쪽에 동시외교를 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북한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건가?  정치권에서나 군사권에서나 우리는 가상 주적을 북한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언론이나 대중에 발표할 때는 '유사시' 라던지 '제 2차 남북전쟁' 이라던지의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한 언급을 되도록이면 하지 않아야 하는 방침이 있다.  즉, '비공식적인 적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적이 아니다' 라고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될까?  적어도 국제 외교관계로만 볼때는 남북 통일보다는 중국의 대만 흡수가 더 쉬워보인다.  왜 그러냐면, 얘네들은 양립이 불가능한 관계니깐 정 안되면 전쟁이라도 벌일 수가 있거든.  상대방을 뭐 반란군.. 이런걸로 규정하면 되니깐.

그런 의미에서 남북한은 왠지 이제는 각각 다른 나라가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국제 무대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150개도 넘는 나라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으니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식으로 관계가 지속된다면 그저 남북한이 '서먹서먹한 남'의 관계가 되어버릴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대신 전쟁이 일어날 일은 의외로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원래 쓰려던 글은 한국의 대 중화권 외교에 관한글이었는데 어쩌다보니깐 일본과 러시아를 제외한 동북아 외교에 대해서 쓴 글이 되버리고 말았네.  여담이지만, 북한은 예전에 이집트에 치안유지의 명목으로 일부 병력을 파견한 적이 있다.  당시에 한국과 이집트는 아직 영사급 관계였고, 중동 국가들과는 많이 친해지기 전이었다.  근데 이 북한의 호의를 잊지 않은 이집트는 후에 무바라크 정권이 북한의 김일성이 서거하기 전까지 남한과의 외교 관계를 영사급 이상으로 격상하지 않았다.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한국과 이집트가 대사급 관계를 수립한 것은 김일성 서거 다음 해인 1995년이다.  미국은 우방의 지도자였던 장개석의 사망 4년 뒤에 미중수교를 했고, 한국은 명목상으로는 어쨌든 92년에 단교 '당하기' 전 까지는 대만과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이렇게 따져보면, 한국은 분명히 할만큼 한 것 같은데 왜 대만한테 그렇게 욕을 먹었을까.  역시 외교는 잘 하는 사람들이 해야된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앞으로 대만의 위상이 국제무대에서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단교를 당하든 단교를 우리측에서 먼저 하든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쨌든 우리만 욕 먹는건 기분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