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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비망록

20211031 - 예민함

by 스프링데일 2021. 11. 2.
사람들은, 둔감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사랑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카시다 암각문


며칠 전 대학교 시절 가까웠던 동아리 친구들을 모아 화상으로 뭉쳤다. 스물 세명이 관심을 보였고, 이 중에서 반만 모여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열 세명이 왔으니 성공일까? 다들 반가웠다.

내가 모르는 녀석들 사이의 관계같은 것들이 있어서인지, 일정의 문제 이외에도 어색하다, 불편하다면서 오지 않는 녀석들도 있었다. 연인도 아니고 친구들 사이에 뭐 그렇게 심각한가라는 생각을 하며 이해가 잘 가진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나도 - 이 녀석들과는 그렇지 않지만 -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해가 되긴 했다.

여전히 나는 방관자가 편한가보다. 사람들을 모으고 투표를 진행해서 일정에 대한 의견을 취합하고 시간과 장소를 제공했다. 처음에 조금 분위기를 띄운 뒤 뒤로 살짝 빠진다. 이 쯤이면 발랄한 녀석들이 조금씩 대화를 주도해나간다. 그러면 다른 녀석들도 조금씩 참여하며 하나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걸 지켜보면 된다.

장소도 가지각색이었다. 한국에 있는 녀석들도 많았지만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멕시코 등등. 지나간 시간만큼이나 각자 걸어온 길들이 있을 것이다. 발 밑을 보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고, 앞을 보면 나아갈 길인 것일까.

어쨌든 나의 경우엔 그렇게 어색한 사이는 없었나보다. 오랜만에 연락을 돌리면서도 내심 걱정을 많이 했지만, 다들 반가웠다. 어느 녀석은 며칠 전에 내가 꿈에 나왔다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는데, 신기하게도 나도 며칠 전에 그 녀석의 꿈을 꿨었다. 우리 학교에서 제일 멋쟁이였던 녀석. (며칠 전에도 멋있었다) 나는 졸업 직전에 그 녀석과 잠시 룸메이트였었다.

함께 살때 불편한 점은 없었다. 비슷한 전공이었고, 또 이 녀석은 그렇게 놀면서도 공부를 잘해서 나에게 많은 자극이 되곤 했었다. 게임하는데 옆에서 아이패드를 켜놓고 공부하는 녀석을 보면 나도 숙연해져서 리딩과 숙제를 열심히 했던 기억.

그런데,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언젠가 내가 녀석에게 무언가 불편했는지 룸메이트로서 한 가지 부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전달하는 방법이 조금 잘못되었던 걸까? 그 녀석의 기분을 조금 상하게 했었던 것 같다.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게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에도 그 당시의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는 어쨌든 지금도 녀석을 좋아한다. 그래서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 그 때의 내 감정을 되짚어보곤 하는데, 사실 같이 살고, 착하고, 잘생기고, 내가 좋아하는 앤데 (나는 얘가 춤추는걸 보고 너무 멋있어서 얘가 있던 동아리에 웹관리를 하러 들어갔었다) 나한테 무슨 대단한 잘못을 했겠는가.. 그냥 내가 예민했던 것이다.

예민함을 가진 내 성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그게 일종의 컴플렉스였다.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지만 뭔가의 예민함으로 인해 친구들에게 진심도 아닌, 상처되는 말을 했던 기억들.. 대부분 이런 경우엔 애들은 나를 잘 이해해주었지만, 뒤늦게 부끄러워진 내 스스로가 도망가곤 했던 기억들이 있다. 친구들의 관계에서도, 연애의 관계에서도.

얼마전 예민함의 장점을 살리는 내용의 클립을 본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예민함이라는 것은 결국 기질의 일종이라 고칠 수는 없는 것이고, 그 예민함의 단점이 밖으로 잘 나오지 않게, 그래서 외부로는 장점이 작용할 수 있게 컨트롤 하는 방법을 터득하면 된다는 것. 코로나가 시작되고 사람들을 만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만의 공간이 있었던 덕분에 좋지 않은 일로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이 없어졌다. 회사의 사람들과도 원만한 것 같고, 친구들과도 대충 잘 지낸다.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엄마와 같이 살면서 부딪히는 부분이 가끔 있는데.. 내 예민함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생각날 수록 나와 룸메이트 생활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 생각나곤 했던 것 같다.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역설적이게도 사람들과의 거리를 두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내향성과 예민함. 이 두 가지 요소는 결국 한 가지로 향한다. 안정감을 위해 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방해받지 않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

아직은 서툴지만 예민함을 조금 더 컨트롤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면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그렇게 된다면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조금은 덜하게 되지 않을까?

어쨌든 나의 전 룸메이트들도 일부 포함된 이번의 모임은 성공적이었다. 가끔씩 보던 녀석들도 있었고, 정말 소식이 궁금했던 녀석들도 있었다. 이런 모임을 다시 하려면 또 비슷한 시간이 흐르겠지? 그 때는 40대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 때도 다시 이렇게 만났으면 좋겠다. 언젠가 마댕이 얘기했던 "신사의 품격" 이 기억난다.

그 때까지 모두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했으면 좋겠다.

너희들이 있어서 의미있는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너희들이 있어서 지금 너희들과의 수 많은 추억을 되돌아본다.

여하튼,
나는 이날 녀석들이 너무 반가웠고,
학교 생활을 잘 한 것 같아서 기뻤다.

끝나고 눈물이 났다.
고마워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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