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비가 내려왔다. 그동안은 "보통의 겨울이니 한 달 정도만 내릴게" 라는 메세지를 갖고 우리를 찾아왔고, 대부분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키곤 했다, 작년까지는. 다만 이번의 겨울 장마는 길었다. 캘리포니아에 전례없던 물부족이라는 프로파간다까지 써가며 제한 정책을 정립하네 마네로 꽤 시끄러웠던 것 같지만, 그런 수 많은 논쟁이나 정치적 싸움의 발생들이 무안해질 정도로 이번의 장마는 길었다.
그리고 긴 장마가 끝나며 약간은 맑아진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얼마전 스스로를 위해 플레이스테이션 4 프로를 선물로 샀다. 물론 돈쓰는건 이게 시작이라서 게임기를 샀으니 게임 타이틀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월급으로 모은 돈에서 눈에 띄는 금액들이 빠져나가는 것은 한편으로는 슬픈 일이었지만, 내 자신을 위해 이런 정도의 일탈과 자극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더 나이가 먹기 전 어린 시절 많이 못했던 것들을 마저 하고 싶었다. 게임을 위해 투자한 돈이 백만원을 넘어가며 조금은 낭비를 한다는 느낌이 생기지만, 무엇보다 나는 게임기나 컴퓨터를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었다.
국민학교 때 일본에 계시던 고모가 보내주셨던 메가드라이브를 통해 소닉과 친구된 적은 있었지만, 나는 유흥이나 여가를 보내는 방법에 늘 많은 제한을 받아왔던 것 같다. 그 결과 내 안에 남아있었던 무언가의 부족함과 열망은 언제나 남들과는 조금 다른 것들을 찾아 헤매게 만들었던 것 같다. 게임만이 아니었다. 차를 산다는 것도 그랬고, 책을 산다는 것도 그랬으며, 아마 여행을 가는 것도 그랬던 것 같다. 인생을 좀더 즐겨왔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의 부족함을 채워나가는 것은 어떻게든 가능한 것 같다. 15살의 고등학생이 필요로 하는 것은 30살의 직장인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있다. 다만, 30살의 직장인의 능력으로 30살의 직장인이 필요로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 같다. 긴 장마가 끝났기 때문에 앞으로는 계속 맑은 하늘이 떠있을까? 우리는 단지 긴 장마가 오면 그 장마가 갈 때까지 잠시 피해있는 것이다. 30살의 나에게 요구되는 것들이 나를 괴롭히면 나는 마치 장마를 피하듯 피하고 싶다.
자연재해 앞에서 인류는 너무나 무력하다. 비가 오면 비를 피할 수 있지만 비가 오지 못하게 할 수는 없는 것. 지진이나 눈사태도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30년쯤 살아보니 아마 인생이라는 녀석도 그런 것인듯 하다. 본인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어떻게 하지 못하는 상황이고, 누구도, 무엇도 믿을 수 없는 상황.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거나 이 또한 또 지나간다는 해묵은 말들. 아무 것도 믿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마주하고 싶지 않다. 보란듯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유치한 꿈은 이제는 바스라져 버렸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다. 갑을관계에서 갑이 착하면 모든 세상이 아름다워질거라는 믿음 속에 가장 많은 권위와 권세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딱히 대통령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고,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지금까지 어떻게든 버텨왔던 것이다. 추구하던 삶과 현재의 삶 속에서 괴리감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약간의 배신감과 원망같은 것이 느껴진다. 마치 끝없이 내리던 비를 피해 살아온 것처럼, 나에게 닥쳐오는 것들을 피해 살아가고 싶다. 최근은 많은 스트레스들을 받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즐겁지 않았고 심장을 뛸 수 있게 만드는 자극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저 살아있다는 감정을 스스로에게 느끼고 싶었다.
세상을 돌아다니지도 못한 작은 수레는 이승의 문턱을 넘나니.
(世の中をめぐりもはてぬ小車は火宅のかどをいづるなりけり)
- 佐久間盛政
세상을 돌아다니지도 못한 소년은 어느덧 20대의 문턱을 넘어간다. 애초에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는 있었던 것일까? 물론 태어난 삶의 의미 같은 것은 스스로 찾는 것이고, 내가 세상에 태어난게 세상을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런 꿈을 꾸게 만든 세상과 그런 꿈을 꾼 내 자신은 양립할 수 없었다. 다툼이 없는 곳에서 저마다의 꿈을 위해 노력하고 또 그것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엇다면, 생활을 하는 것만으로 지쳐가는 삶이 아니었다면, 아니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었다면 '나' 라는 존재는 지금과는 다른 형태를 갖고 있었을까?
물론 스스로의 형태를 변경시키는 것은 대단히 힘든 것이고, 그 형태의 변화를 위해서는 많은 노력들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이끌어주는 사람 또는 귀감이 될 수 있는 사람의 존재 없이 많은 것들을 스스로 터득한 편인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모른다고 얼마 전 결론을 내렸다. 어두운 바다와 하늘의 저편에 다툼이 없는 곳이 있다고 가르쳐 준건 누구였을까? 누구라도 좋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더 이상 현재의 삶의 방식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 같다. 더욱 싫은 것은 새롭게 가치관을 정립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나이가 한 살 늘어가고, 이에 비례해 삶의 장마는 끝나지 않는 것 같다. 15살의 부족함은 30살에 채울 수 있었지만, 30살의 부족함은 아마 60살이 되어도 불가능해보인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진실의 갯수는 아마도, 사람의 수 만큼 존재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의 진실은 단 하나 뿐이라는 것. 좁은 세계관으로 만들어지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변경된 정보, 어긋나 있는 진실이 팽배하다. 이처럼 단 한 개체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세계관이라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 자신의 작은 척도로 밖에 세상을 보지 못한다. 때때로 자신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세계를 자신의 기준만으로 멋대로 판단하고 해석한다.
- 스프링데일
작은 수레는 아마 세상을 돌아다니지 못할 것이고, 곧 낡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도, 작은 수레도 긴 장마가 끝나면 약간은 맑아진 하늘을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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